바람 부는 날 / 김종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 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 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 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시집『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문학세계사, 1990) ....................................................................................
꽃이 피고 비가 오는 날이 있으면 바람 부는 날도 있다. 낙엽 지고 눈 오는 날이 있으면 모진 바람 차가운 날도 있 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바람 부는 날. 일기예보에도 없는 그저 나뭇잎 조금 흔들리고, 길에 버려진 껌종이조차 몸을 뒤집기는 어려운 날. 대충 남실바람 부는 날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내 안에서 부는 소슬바람.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어떤 이는 압구정동으로 차를 몰아가고, 어떤 이는 언덕으로 뛰어 올라가지만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간다. ‘날마다 가고 또 가 는’ 길을 간다.
그래서 무슨 바람이 불었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비록 가는 길 험하더라도 내 사랑의 오지인 그곳으로 나는 갈 수 밖에 없으므로.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들고 당신을 향해 가는 그 길은 숙명의 외길.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길.
바람으로 인한 미세한 떨림, 진동, 너울 다 홀로 감당하며 혼자 외롭고 힘들지만 행복해 하며 가는 길. 그 길. ‘지 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간다. 사방 어두워 눈에 보이는 것 없어도 막무가내로 간다. 오체투지로 달려간다.
가면서 시름 다 잊고, 원망의 기울기도 낮추고, 그저 내 마음의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당신을 향해 간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나 숨어버리듯 가고야 말리라.
그 역에 당도하면 나 혼자만 내려 층계를 탕탕탕 뛰어올라 갈 것이다. 그때쯤이면 숨이 벅찬 만큼 가슴도 벅차오를 것이다. 이제 곧 당신의 가슴 깊은 곳 핵심에서 불타오를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괴로움 다 불살라 버릴 것이다. 영원 으로 치솟아 오를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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