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난 순
교복 호주머니 속에 빨갛게 마른 고추 서너개,
수시로 꺼내어 코 끝에 대어보며 즐기던 추억
투명한 고추에선 노란 씨알이 댈그락 거렸다
바깥마당에 널어 말리던 그 가을을 훔쳤던 거다
고추 널린 멍석
고요가 초대한 갈볕 따끈해 지며
바람이 잠시 감춰 뒀던 단내 풍기는 동안
담 넘어 이웃에 까지 소문 내는 매캐한 재채기 소리
잎 넓은 플라타너스 그늘이 수런거리며
마당 끝에서 바라보고 있다
살찐 고추 배를 갈라 노란 알맹이 털어내어
홀쭉하니 줄여놓는다
마디진 손가락에선 익숙한 가위질로 여문 가을 여는 소리
어느새 벌들 두어마리 기웃거린다
어머니의 엄지와 검지도 이렇게 빨간 물이 들었었겠지
식구들의 밥상에 붉은 깍두기 국물로,
북어국의 얼큰한 술국으로 아버지의 속을 풀어 주었겠지
온 몸의 붉은 핏줄 바싹 마르며
비린내 대신 매운내, 갈볕에 노랗게 춤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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