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은 알림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손님 같다. 반갑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고민하는’ 것이 ‘사는 것’이며 ‘고민하는 힘’은 ‘살아가는 힘’이라는 어느 교수님의 말씀에 위로가 된다. 고민 중에 가장 어려운 고민은 인간관계이다. 자기 중심의 자아를 담벼락처럼 높게 쌓아 올려 놓고 불법 침입을 했다느니 인신공격이니 하며 자신의 잣대로 타인을 평한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인으로 쓰고 다니는 가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의, 체면, 타자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그러나 가면을 썼음에도 단체 모임에서 의로운 척, 선량한 척 하는 것이 그대로 보이는 사람을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올해는 문학회에서 여름 문학축제로 즐거운 날도 있었지만 마지막 달까지도 불미스러운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다음 회장 선출 문제 때문이다. 회원 중의 한사람이 스스로 회장 후보로 나오겠다고 알렸지만 그에 관한 놀라운 기사를 읽었고 사실여부를 알아야 했기에 기사 한 편을 단체 카톡 방에 올렸다. 그런데 기사 속의 주인공이 아닌 다른 회원이 말하길 내가 문제를 일으켰고 도를 넘었다고 한다. 직설적인, 인신 공격같은 글은 자제해 주고 의도적으로 몰아가는 정치판 같은 모습에 스트레스가 된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이중성에 깨달음이 있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을 다시 인식했다.
그렇게 나를 평한 본인은 다른 회원에게 회장 선출을 지명제로 하자고 말 같지도 않는 소리로 선거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자신의 글방에 죽은 자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신상을 올려 놓았다. 죽은 자는 인권도 없는가. 죽었다고 그 사람의 인격조차 사라지는가. 그리고 나에게 이런 글을 썼다. “이선생님이 쓰신 글에 대해서 열매를 맛보실 날도 있으시겠죠.” 이 글을 읽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다른 사람의 눈 속에 들어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내라.’ 문학회에서 그를 목사라 부른다. 목사의 인격이 이 정도인지 고민스럽다. 세상에서 풍자되고 있는 목사가 아니고 먹사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무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과 의식 속에 사는 사람은 다르다. 나도 남에게 어떤 인간인지 돌아보아야겠다. 싫든 좋든 타자와 내가 상호 인정 없이는 자아가 존재할 수 없다니 말이다.
“고민하는 것은 옳은 것이고, 확신할 때가지 계속 고민하는 것이 좋다. 어중간하게 하지 않고 진지하게 끝까지 고민하는 것” 퍼온 글이지만 이것이 고민의 힘이 아닐까. 살아가는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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