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1월 초에 출근했다. 아침 7시 30분쯤에 집을 나섰다. 차 안의 방향키가 북동쪽을 가리킨다. 밖은 이미 밝았다. 갑자기 동쪽이 나와서 해가 떴나 하고 차창 밖을 살펴도 모르겠다. 조금 더 가니 이번에는 북쪽이 나왔다. 둥근 달이 니를 따라오고 있었다. 날이 밝았으면 달도 잠들러 가야 하지 않을까. 쫓아오는 달을 보다가 차선을 잠깐 밟았다. 아이코 정신 차리자. 조금 가다 보니 북서쪽이 나오더니 갑자기 둥근 해가 내 차의 뒤쪽을 비추며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내 시야를 가린다. 선글라스를 써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 두 눈을 찌그러트려서 햇빛의 반사를 최대한 막고 간신히 통과했다. 그런데 또 북쪽이 나오더니 달이 계속 내 출근길에 동행하고 있지 않은가. 시간은 8시도 지났다. 아침은 대낮처럼 밝은데 달은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잠이 덜 깬 나를 쫓아오며 괜찮냐고 묻는다. 해와 달이 아침에 모여서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요즘 현대인들의 출근길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른 새벽에, 늦은 밤에, 때로는 대낮에도 출근한다. 그래서일까 달님도 해님도 우리를 위해 서로 부딪치면서도 자신의 쉼터에 들지 못하고 맡은 임무에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부딪침은 껄끄럽고 부담스럽다. 살짝 어깨만 스쳐도 미안하다고 인사하는 미국 생활에서는 자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서로 역활이 완전히 다른 부딪침은 무슨 말이 필요할까. 기름을 사용해야 하는 곳에 물로 대신했다면, 사과해야 하는데 자신의 자랑만 늘어놓는다면 배부르게 먹고 나온 직후인데 밥 먹으러 가자는 꼴이다. 불붙은 곳에 기름을 부으면 화재로 직결되는 것은 모두가 아는 상식이다.
요즘은 인간관계가 화두다. 가장 복잡한 관계, 마음과 마음의 관계, 그 관계로 우리는 상처받고 상처를 주고 있다. 사이코패스니 소시얼패스니 가스라이팅이니 신조어가 끝없이 등장하고 있다. 과거 우리 부모 세대와 조부모 세대의 삶을 돌아보면 참으로 아름답다. 이웃과 서로 품팔이를 하며 도왔고, 슬픔도 기쁨도 내 일처럼 생각하며 살았다. 지금은 가족도 서로 자기 일이 아니라고 무심하게 관심을 끊고 살아간다.
서로 배려하고 돕고 살지 못한다면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집착에서 털고 나와야 하지 않을까. 무가치한 감투를 달겠다고 비열한 짓거리로 남에게 상처 주는 양심도 빼 놓고 사는 사람이 문학을 한다고 그것도 문학회의 산증인이라고 떠벌리는 현실이다. 슬픔에 배탈이 난다. 그 많은 감사장을 죽어서도 갖고 가겠다면 휘청이는 몸으로 허리 부러지겠구나.
잠들지 못하는 달님이 오늘은 왜 이리도 마음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미련한 우리 인간을 위해 저토록 단잠을 미루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 고마움을 모른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