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봉감 300그루와 레몬 한 알
얼마 전 친구들과 카페에 모여 차를 마시다가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 하나가 화제가 되었다. 경남 함안에서 수확을 앞둔 대봉감 300그루의 열매를 몽땅 도둑맞았다는 소식이었다. 그 가차가 1,000만원이 넘는데다, 감나무에 손상 하나없이 께끗하게 따간 솜씨로 보아 전문가의 소행이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이것은 감을 훔친 게 아니라, 농부의 1년을 통째로 훔친 것이야."
"정말 황당하고 미친 짓이다."
"이런 도둑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등등의 의견이 오가며,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는 이 비열한 도둑들에 대한 분노와 성토를 쏟아냈다.
감나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곶감으로 유명한 충북 영동이 고향이신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해마다 겨울이면 서울 살던 우리에게 외갓댁에서 곶감을 보내주셨다. 눈가루가 내린 듯 하얀 분이 뽀얗게 덮인, 갸름하고 말랑한 곶감은 꿀보다 더 달고 맛이 있었다.
어머니는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어느 날 동네 아이들이 뒤뜰에 있는 감나무에 달린 감을 '서리'하는 것을 보고, 엄마는 화가 나서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 할아버지께
“아버지, 동네 아이들이 우리 감을 다 따먹어요” 했단다.
그 말을 들은 외할아버지는 피우시던 긴 곰방대로 재떨이를 툭툭 치며 느긋하게 말씀하셨다.
"그냥 두어라. 갸들이 아무리 먹어도, 내가 더 먹지 걔들이 더 먹겠냐."
지금은 추억처럼 이야기 거리가 되었지만, 그 배고프던 시절에 '서리'라는 것은 참 묘한 구석이 있었다. 분명 도둑질은 도둑질이되, 서리를 하는 아이들에게는 허기를 달래는 수단이기도 했고 짓궂은 장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허허 웃어넘길 수 있던 어른들의 여유도 있었다.
하지만 함안의 그 사건은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서리가 아니고 도둑질이며 약탈이다. 한 농부의 1년 치 노동과 희망을 통째로 훔쳐 간 것이다.
천 평 과수원을 기꾸는 농부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수확을 위한 노동의 무게를 나도 조금은 안다고 말하고 싶다.
5년 전쯤 식물 키우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딸아이가 레몬 나무를 선물로 보내왔다. 화분에 담긴 작은 레몬 나무는 신기하게도 그해 봄부터 꽃을 피웠다. 어느 날 정말 달콤한 꽃향기가 나서 거실을 둘러보니, 자잘한 하얀 꽃들이 진초록색 잎사귀 사이사이로 가득 피어 거실 전체에 달콤하고 황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른 봄에 피기 시작한 꽃은 여름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꽃을 피우던 레몬 나무가 작년부터는 꽃이 진 후에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꽃이 떨어진 그 자리에 작고 단단한 초록색 콩알만 한 열매가 맺히더니, 정말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조금씩 커져 초록색 콩알이 초록색 탁구공만 해지며 가지 끝 쪽의 레몬 배꼽이 뚜렸해진다. 한여름 땡볕을 받으며 짙은 초록색은 서서히 엷어지며 희미한 노란색으로 변히고 노란색이 짙어질 쯤이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제는 베란다에 있던 화분을 거실로 들여올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겨울 내내 화분을 아침에는 동쪽 창가로, 오후에는 남향 창가로 옮겨가며 해바라기를 시킨다.
그렇게 겨울을 나며 샛노란 레몬 열매가 작은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흐뭇한 광경이다. 친구들이 놀러 와서 "조지아에서 집안에 레몬이 이렇게 주렁주렁 열린 것은 처음 보네!" 하고 감탄할 때면, 나는 무슨 대단한 업적이라도 해낸 것처럼 뿌듯해진다.
상점에 가면 아마 5불만 줘도 내 레몬 나무에 달린 열매 전부를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실에 열린 이 레몬 한 알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 할 수 없는 진정 '프라이스레스‘(priceless)이다. 내 정성을 먹고 자란 소중한 보람인 것이다.
이 한 그루의 나무를 키우기 위해 들인 나의 정성과 시간이 이토록 소중할진대, 하물며 300그루의 감나무를 키운 그 농부의 1년은 어떠했을까.
외할아버지의 곰방대 끝에서 피어오르던 넉넉함은 이제 정말 먼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작은 나무에 열린 나의 보물 같은 레몬 열매를 보며, 텅 빈 감나무밭에 망연자실 서 있을 그 농부의 모습이 겹쳐진다. 한 해의 희망이 송두리째 뽑혀나간 그 참담함, 땀으로 얼룩진 시간을 보상받을 길 없는 절망과 허탈함에 잠겨있을 농부의 마음을
나의 레몬 한알의 무게로 조심스레 짐작하며 위로와 응원을 보내고싶다.
김 수린. 10/3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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