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올린 어느 기사를 인용해 보면 미국의 배운 자들은 가치 중립적인 단어들로 ‘세련된 간접화법’을 구사하는 데 능숙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cheap’보다 ‘budget’이나 ‘affordable’이 같은 의미라도 더 품위가 있어 보인다고 한다.
초여름에 딸이 budget travel을 한다기에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어느 웹사이트에 연회비를 내고 등록을 하면 되고 자신이 원하는 곳을 선택해서 숙소나 음식 등을 제공해주는 호스트를 찾아서 쌍방의 정보교환을 통해 의견이 일치하면 유럽 여행을 저렴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 주는 대신에 딸이 해아 할 의무가 있다. 하루 두 번, 두 마리의 개를 산책시켜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간단한 저녁식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십 대 초반인 딸이 혼자서 한 달도 넘는 장기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왠지 걱정되어 나도 함께 가도 되는지 호스트에게 부탁을 해보라고 했더니 쉽게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딸은 독일을 거쳐 나와 함께 머물 오스트리아 빈으로 먼저 떠났다. 딸이 준 정보를 보니 초대해준 크리스틴은 비엔나의 테크니컬 칼리지의 대학교수였고 건축학을 전공했으며 싱글맘이고 열 여덟 살 딸이 하나 있지만, 따로 살고 있다.
빈에서 기차를 타면 사십 분 정도 걸리는 산속의 마을이었다. 조지아의 푸르름 이상으로 사방이 녹색 천지였다. 크리스틴 집에는 몇 그루의 사과나무에 올망졸망한 사과들이 촘촘하게 달려 있었고 뜰에는 텃밭에서 자라는 먹거리 채소들이 가득했다. 그뿐만 아니라 딸기와 블루베리 비슷한 열매들이 많았다. 수영장이 있어서 더위도 견딜 수 있었다. 집 안은 통나무집 같이 만들어서 마치 산 속의 별장에 놀러 온 기분이들었다.
크리스틴 집에 도착하기 전, 딸이 풀어 놓은 나의 여행목적을 듣고 공감을 했는지 우리 모녀에게 과분한 배려를 해 주어 주인과 객이 바뀐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는 아직 방학하지 않아서 매일 학교로 출퇴근하는 크리스틴을 따라 비엔나 관광을 하기도 했고 바로 윗집에 쌍둥이 자매가 살고 있어 가능한 우리 모녀가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해 주었다. 처음 본 외국인에게 아주 개방적이고 무척 친절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딸이
제자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인 학생 두 명이 자신의 강의를 듣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저녁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했다. 크리스틴은 우리 가족과 일상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고 자신의 이야기도 했다. 숨김없이 자신의 허물도 털어놓는 그녀를 보면서 가면 쓰고 대했던 내 태도를 부끄럽게 생각했다. 크리스틴은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딸을 낳았는데 , 그 딸이 문제아인 모양이다. 공립학교는 적응을 못 해서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매달 내야 하는 수업료에 경제적으로 부담이 크다고 했다. 게다가 엄마하고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고 해서 지금은 크리스틴의 부모님과 살고 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눈가를 훔치는 모습에 나도 울뻔했다. 우리 모녀를 보면 더욱 딸 생각이 날텐데 그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 않았을까 미안하기도 했다.
세상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가족과의 불통, 빠듯한 살림, 오염된 자연환경, 바쁜 일상생활, 청소년 문제 등등…… 그러나 크리스틴에게 배울 점은 너무 많았다. 항상 자연생태계를 고민했다. 그래서 화장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화장품에도 아주 작은 미립자의 해로운 성분이 있어 그것이 강으로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환경오염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옷도 거의 천연 소재만 입었고 아주 검소한 생활을 했다. 들고 다니는 가방도 안을 들여다보니 많이 낡아서 버려야 할 것 같았지만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떠나기 전 조그만 선물을 주었더니 포장지를 너무 조심해서 뜯기에 물어 보았더니 재사용하겠다고 했다.
외국여행에서 명소를 찾아 다니는 것도 즐거움이었지만 현지인과 생활하며 소통을 해 보는 것도 아주 뜻깊은 일이었다. 이 여행조차도 사실은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언제나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는 멘토같은 오언니의 응원으로 다녀왔다. 경비를 절약했던 이번 여행은 비싼 호텔에서 호사했던 여행보다도 백 배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크리스틴과 즐거웠던 일들의 머릿속 영상을 돌리고 있었는데 애틀랜타 공항의 입국 심사관에게 질문을 받은 순간, 좋은 영상들이 말려 들어 가면서 갑자기 끊기고 말았다. “ 어딜 다녀왔죠, 누구와 만났나요, 특별히 사 온 물건이 있나요, 만 불 이상의 물품을 사 왔나요?” ‘저, budget travel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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