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한 삶
이경화
맘에 드는 M 사의 겨울 재킷을 사기위해 발품을 팔아가며 찾고 있었다. 같은 브랜드라도 쇼핑몰의 위치에 따라 가격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내 기준으로 보는 착한 가격이라면 행운도 따라야 한다.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 심심찮니 사람들이 모였다. 바로 마지막 세일 상품 진열한 곳으로 가서 꼼꼼히 살피고 있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재킷이 보였다. 치수도 색상도 브랜드 이름도 일치했다. 옆에 있던 미국인 모녀까지 내가 선택한 것을 부러워했다. 계산대로 달려가서 가격을 확인하고 카드로 결제를 하려는데 핸드백이 없었다. 순간에 몰려오는 황당함과 분실 후에 치러야 하는 불편한 절차들을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고작 물건 하나 싸게 산다고 이성을 잃고 핸드백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알 수가 없다니 얼마나 지질한 삶인가. 거의 울상이 되어 있는데 주위 사람들이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다. 탈의실에도 가보고 주변에 있는 선량한 사람들까지 살펴보았지만 허사였다.
“돈이란 이른바 육감 같은 거야. 이것이 없으면 나머지 오감도 도저히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일세. …… 가난이야말로 예술가에겐 최고의 자극이라는 둥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녀석들은 아직 가난의 고통을 진정으로 겪어보지 못한 것이 뻔해.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박하게 만드는가를 아직 모르고 떠드는 수작이지. 가난이란 사람을 한없이 비열하게 만들고 그 날개를 잘라버리고, 마치 암처럼 혼을 마구 파먹어 들어가는 것일세.” 서머싯 몸의 작품 ‘인간의 굴레’에서 프와네 교수가 했던 말이다. 요즘 부쩍 내 삶이 지질하게 느껴진다. 핸드백 하나에 몇천 불 하는 매장을 서슴없이 걸어 들어가고, 비싼 물건을 주저 없이 사 들고 나오며, 가진 것은 돈 밖에 없다는 사람들을 볼 때, 생각지도 않은 배려금을 받고 감성대가 터지며 목청이 막힐 때 초라해진다. 돈이란 사람을 지질하게 만든다. 가진 자에게 주눅 들고 비싼 물건에 기가 죽고, 갖고 싶은 욕망에 씁슬하다.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르다가 친구 집에서 게걸스럽게 얻어먹던 추억도, 돈 많은 선배가 옷 좀 잘 입고 다니라는 충고에 한 달 수입의 거액으로 비싼 옷을 샀던 기억도 나의 육감과 오감을 갈아먹은 원충이었다.
삶이 후줄근하다고 느껴질 때 실생활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큰 집에 사는 이웃사람을 생각한다. 배 한 상자가 비싸다고 안 사 먹고, 그러면서도 남에게 뭐라도 사 주고 싶어하는 사람, 값비싼 귀금속 가게에 십 불도 하지 않는 시곗줄을 고치러 가는 사람, 물건값을 깎지 않는 사람, 사치를 하지 않고 그 돈으로 여러 단체에 기부금을 낼 줄 아는 사람, 노인들을 대접할 줄 알며 정기적으로 책을 사서 마음의 양식을 쌓는 사람이다. 가진 게 없어서 지질한 삶을 사는 사람과 있으면서도 검소하게 사는 사람을 감히 동급이라 함은 어불성설이지만 이런 이웃과 함께 살아감이 나에게는 힘이 되고 지질한 삶도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슬프지 않은 위안이 된다. 남과 비교하지 말라고 하지만 때로는 의미 있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들을 보면서 새해는 지질한 삶을 해탈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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