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이 이유없이 손을 내미는 갑갑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우리 가족이 조지아 남쪽의 조그만 도시로 이사를 왔다. 백인과 흑인 비율이 7:3 정도이고 동양인은 1-2%에 스페인계도 아주 적은 동네다. 그런데 놀랍게도 흑인 꼬마 녀석이 손을 내민다. 돈을 달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이걸 줘야 해 말아야 해를 뒤집으며 고민을 했었다. 사탕을 사 먹고 싶으면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하지 생판 모르는 이방인에게 구걸할까. 그까짓 1불 그냥 줄 수도 있지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데 내 마음은 갈등이 오간다. 어떻게 왜 무엇 때문에 나에게 손을 내미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래도 꼬마 녀석이 속셈은 없겠지 순수하게 생각하며 그냥 1불을 내주었다.
지금은 그 시골을 떠나 조지아 도심지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 한나절의 뜨거운 햇살이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 때 쯤 산책하러 나갔다. 가까운 거리도 차만 이용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발로 걷고 싶었다. 기분 좋게 사방팔방을 둘러보며 자연과 집들과 오고 가는 차들과 간간이 나처럼 걸어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뒤를 쫓아오던 한 녀석이 1불을 요구한다. 1불에도 양면이 있듯이 줄까 말까를 반복하는 두 마음을 놓고 고민을 해야 했다. 몇 학년이냐고 물었더니 10학년이란다. 고등학생 녀석이 이유없이 뜬금없는 1불을 구걸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 어디에 쓰려고 그러냐고 물었더니 물을 사 먹고 싶단다. 갈증이 나서 죽을 지경이냐고 묻고 싶기도 했고 물 먹고 싶으면 좀 더 걸어가면 수돗물이 있는 가게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그 녀석도 알고 있을 듯해 그냥 1불을 내주었지만, 마음은 양심으로 갈라져 주고 나서도 개운치 않았다. 그 나이에 남에게 대가 없는 돈을 요구한다는 것도 그랬고 전혀 수치감도 없이 말하는 태도가 불쾌했고 물을 꼭 사서 마시고 싶다면 왜 1불을 얻기 위해 노력을 안 하고 그냥 달라고만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1불 가지고 뭘 따지냐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인색한 인간처럼 보이지만 1불이든 10불이든 남의 소유를 무조건 달라고 하는 것은 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거지와 무엇이 다른가. 또한 주는 사람 역시 유쾌하지 않다. 주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주면서도 즐겁지 않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고 여러사람들에게 같은 수법으로 돈을 구한다면 그는 상습범이 되어 힘들게 일하지 않고 쉽게 살아가려 할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런 불유쾌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고등학생 딸이 로컬 칼리지에서 인턴십을 하고 있어 일주일에 세 번은 대학 캠퍼스로 간다. 두시간 반 동안 딸과 교수가 함께 하는 시간에 나는 책을 읽는다. 그날도 어김없이 손을 벌리는 대학생이 나타났다. 1불이 필요하다며 말을 걸어왔다. 무엇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프린트를 하기 위해서란다. 1불이 없어서 프린트를 못한다면 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또 다른 마음에는 1불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진다. 또 갈등이 앞선다. 그러다가 내민 손이 무색해 보일까 봐 주고 말았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녀석은 또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수법으로 돈을 요구한 사실을 알았을 때 내가 건네준 1불을 돌려받고 싶어졌다. 어디로 갔는지 빌딩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
돈이 없던 시절에 배가 고파도 차비가 없어도 수치심과 자존심으로 가까운 친구에게도 말을 못 하고 참고 다녔는데 미국 아이들, 미국 사람들은 우리와 사고가 다른 걸까? 구걸하는 사람보다 줘야 하는 내 입장이 더 난처하다. 적선에도 찬반이 있다. 주는 것은 사람들을 나태하게 만들고 안 주는 것은 동정심도 없는 몰인정한 인간이라고 비평을 한다. 충분히 일 할 수 있는 신체와 정신을 가진 자라면 무조건 손을 내민다고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아니다 웃고 넘어갈 소리가 아니다. 1불을 요구하는 사람이 십 배, 백 배 요구 못 할 이유가 있을까?
1불에도 양면이 있듯이 내 마음에도 두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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