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할머니와 리치 할아버지
이경화
마리아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으러 오신다. 무릎 관절도 안 좋으시고 과체중인 데다 손도 저리고 이곳 저곳 몸이 불편하다. 기우뚱 기우뚱 걸음걸이도 힘들어 보인다. 음식을 하다가 끓는 물에 뎄다는 커다란 상처가 발등에 있다.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밀실과 날실이 심하게 꼬인 것처럼 끔찍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도 단지 운이 나빴다고 말할 뿐 신세타령은 하지 않았다. 치료할 때 언뜻 보이는 팬티는 항상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치료 전 가운으로 준비된 바지도 드리는데 입고 벗기가 불편하신지 윗옷만 갈아입으니 쉽게 눈에 띈다. 얼굴은 몸이 불편하니까 웃는 인상은 아니어도 왠지 따뜻해 보인다. 계속 만나다 보니 가벼운 대화도 더러 오간다. 치료가 끝났어도 생각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떨어진 팬티를 입고 다녀도 거리에 나 앉은 거지들에게 몇 달러라도 건네주는 할머니, 불우한 이웃이 있으면 부족해도 조금이라도 베풀 수 있는 할머니. 그러면서 자신은 그들보다 행운아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뜨거워진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치료실을 나가기 전 꼬깃꼬깃한 몇 달러를 내 손에도 쥐여주시는 할머니. 팬티에 구멍이 하나도 아니고 숭숭 뚫렸어요 라고 차마 말하지 못한다.
리치 할아버지는 아픈 곳이 너무 많다. 아프지 않은 곳을 말하기가 더 쉽다. 얼굴만 봐도 많이 아파 보인다. 긴 세월의 아픔 자국들이 얼굴을 덮고 있다. 신체의 아픔을 경험도 없이 가정해서 말하고 동정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지만 만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말하고 싶다. 치료실에 들어오자마자 아파 죽겠다고 말씀하신다. 자주 치료를 받으시는데도 좀처럼 신체의 병이 낫지를 않는다. 전에 치료를 담당했던 치료사들의 말로는 고칠 수도 없고 고치려고 하지도 말라고 한다. 리치 할아버지는 환자와 치료사도 서로 맞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내가 좋다고 하신다. 그러나 그 말에 공감할 수 없다. 아파서 치료할 곳을 알고 있는데도 할아버지는 자신이 치료사가 되어 나에게 지시를 한다. 여기를 이렇게 해 주고 저기를 저렇게 해 주고. 원하는 대로 해 드려야 만족해하신다. 효율적인 치료가 아닌데도 순응한다. 치료가 끝나면 다음 스케줄까지 점검하신다. 다음 환자가 있는지 없는지. 왜 묻느냐고 되물어보고 싶지도 않다. 철저히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기중심적 인물이다. ‘너만이 너다’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둘도 없는 자신을 아끼고 보호할 줄 아는 분이시다.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일을 남을 위해 무리하게 애쓰다가 몸을 앓게 되는 사람보다는 훨씬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분이다. 그런 분을 감히 나쁘다고 평할 수는 없지만 자기 관리를 그렇게 잘하는데 왜 자신의 몸 관리는 안 되는지 의문이 간다. 다른 환자보다 요구 사항이 많아서 소모되는 에네지도 배로 든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고맙다는 인사도 없다. 참다못해 할아버지 치료하다 내가 병나겠다고 말했더니 쓴 웃음뿐이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 싶어 할아버지 뒷모습을 따라나섰다. 주차장에서 벤츠 차에 시동을 거시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마리아 할머니가 건네준 꼬깃꼬깃한 일 불짜리 지폐들이 내 손에서 웃고 있다.
과연 나는 어떤 인간인가. 남 앞에서 떨어진 팬티를 입고 초연할 수도 없고 벤츠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재력도 없다. 베푸는 자와 받기만 하는 자의 중간쯤에서 서성이는 자신이 부끄럽다. ‘나만이 나다’ 라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내 가치로 가면을 쓰고 두 분의 삶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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