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탑승 시간을 생각하니 지루해서 일찍 호텔에서 나와 공항으로 갔다. 포루투갈 여행이 무사히 끝났다.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빨리 수속을 마치고 싶었다
두 줄로 섰지만, 앞에서 두 번째, 직원이 우리를 불렀다. 여권과 탑승권을 보여주니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여행 가방을 들어서 올려놓으라고 했다. 가방 한 개에 90유로. 왕복으로 계산해 보니 편승 한 사람 티켓값이다. 비싸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어쩌랴 부르는 게 값이다. 남편의 크레딧 카드를 주었더니 핀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애틀랜타 공항에서도 같은 항공사로 왔었고 같은 크레딧 카드로 결제를 했는 데 쓰지도 않는 번호를 달라고 하니 난감했다. 혹시나 하고 내 크레딧 카드를 넣어도 핀 넘버 없이는 결제가 안되었다. 갖고 있던 현금을 건넸더니 카드만 받는다며 방법이 없으니,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우리는 동시에 ‘노’라는 듀엣을 불렀다. 이렇게 부부가 한마음이 되어 본지도 오랜만이었다. 립스틱과 볼 터치를 단풍처럼 그린 그녀를 보니 내 얼굴도 빨갛게 뭉개지고 있었다. 미쳤어! 내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에 그녀는 시작한 지 십여 분도 안 되었는데 일을 접고 자리를 뜨겠다고 옆에 있는 직원에게 직언을 날렸다
불쑥 튀어나온 세계 공통어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나보다. 시간은 지체되고 뒤로 길게 서 있는 미안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내가 미칠 것 같았다 지금껏 독일과 포루투갈의 크고 작은 상점에서 아무 탈 없이 썼던 카드가 알려진 항공사에서 결제가 안 된다니 시퍼렇게 멍든 내 심장을 꺼내서 보여주고 싶었다. 핀 넘버가 필요한 은행 데빗 카드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즉석에서 만들어 보고 기억나는 숫자를 조립해도 헛수고였다
숫자에 묶여 사는 삶이 스트레스다. 모든 곳에서 비밀번호는 남이 도용하지 못하게 어렵고 길게 쓰라고 했다. 가족의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하는 자동화 시대에 숨겨 두어야 할 번호가 몇 개나 되는지조차 모른다. 피트니스에서 자신의 자물쇠 번호를 몰라 거대한 가위로 잘라서 겨우 옷을 갈아입던 그녀도 생각났고 홧김에 아파트 현관 번호를 바꿔서 밖에서 날밤을 새웠던 이웃도 보았다. 기억하지 못해서 집으로 돌아가 숨겨둔 번호를 찾아서 겨우 일 처리를 했다는 언니의 하소연도 생각났다. 어느 모임에서 나는 7번으로 통한다. 나이 순으로 정해진 번호다. 이름은 사라지고 숫자가 존재한다
‘여기 시스템이 미쳤어.’ 초긴장 속의 입 터짐으로 오해는 풀렸나보다. 그녀는 붉게 물든 얼굴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우리는 매니저와 면담을 요구했지만, 매니저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다른 직원이 와서 두 가지 해법을 알려줬다. 어디가서 온라인으로 결제를 해 보던가 여기 있는 사람 누군가의 카드와 내 현금을 교환하라고 했다. 우리는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는데 지체 없이 한 분이 도와주셨다. 긴 시간을 헤매다 무사히 수속을 마쳤다. 뒤를 돌아서 다시 고맙다고 인사하려 했지만,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마법처럼 어디서 뿅 하고 나타났을까? 자리를 뜨기 전에 갑자기 우리에게 빨간 웃음을 짓던 섬뜩한 여직원의 얼굴이 생각나서 올가을 단풍 구경은 가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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