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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가을되다

이난순2023.11.26 01:54조회 수 82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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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난  순

 

 

교복 호주머니 속에 빨갛게 마른 고추 서너개,

수시로 꺼내어 코 끝에 대어보며 즐기던 추억

투명한 고추에선 노란 씨알이 댈그락 거렸다

 

 

바깥마당에 널어 말리던 그 가을을 훔쳤던 거다

 

 

고추 널린 멍석

고요가 초대한 갈볕 따끈해 지며 

바람이 잠시 감춰 뒀던 단내 풍기는 동안

담 넘어 이웃에 까지 소문 내는 매캐한 재채기 소리

잎 넓은 플라타너스 그늘이 수런거리며

마당 끝에서 바라보고 있다

 

 

살찐 고추 배를 갈라 노란 알맹이 털어내어

홀쭉하니 줄여놓는다

마디진 손가락에선 익숙한 가위질로 여문 가을 여는 소리

어느새 벌들 두어마리 기웃거린다

 

 

어머니의 엄지와 검지도 이렇게 빨간 물이 들었었겠지

식구들의 밥상에 붉은 깍두기 국물로

북어국의 얼큰한 술국으로 아버지의 속을 풀어 주었겠지

 

온 몸의 붉은 핏줄 바싹 마르며

비린내 대신 매운내, 갈볕에 노랗게 춤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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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입은 그대를 벗기며 그녀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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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 숨겨진 비결 - 이렇게 정성과 사랑으로 일구어 낸 까닭에 청양고추가 유명한 가 봅니다.

     

  • 이난순글쓴이
    2023.11.27 07:01 댓글추천 0비추천 0

    ㅎㅎㅎ,한국에선 옛날에나 이렇게 태양초를 (햇볕에 말린거를 태양초라고 함) 만들었지, 요즘엔

    그렇지를 못 한다는군요.

    제가 덴버에 있었을 때 고추 말리던 생각이 나서 쓴겁니다

    콜로라도 덴버에서 재배된 고추는 한국 고추보다 훨씬 크고 살집도 아주 좋았으며, 맛도 훨씬 좋아서 한국사람들이

    무척 좋아하더라고요. 그리고 햇빛이 좋으니 모두다 질 좋은 태양초 고춧가루 이고요.

  • 덴버 고추가 청양고추를 훨씬 능가하는군요

    청양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울겠는데요.

    그 놈의 미제 고추때문에 ㅎㅎㅎ

  • 교복 호주머니 속에 빨간 고추를 넣고 다니셨군요. 저에겐 생소한 느낌이네요.

    소녀 감성도 환경에서 나온다는 것에는 공감해요.

    알고보면 엄지와 검지가 하는 일이 아주 많아요.

  • 이경화님께
    이난순글쓴이
    2023.11.29 07:51 댓글추천 0비추천 0

    저도 왜 그렇게나 고추향을 좋아했는지 몰라요. 매캐하며 달콤한게 촌 계집애의 향수 나 된 듯 말이죠.ㅎㅎ

    빨갛게 널려 있던 그 풍경이 아마도 너무 좋았던것 같아요

    어머니가 썰어 말리는 호박고지가 둥글 둥글 말려서 빨랫줄에 걸린것도,빨간 대추멍석에서 쪼글쪼글 말라가던

    대추의 단 내도......

  • 익어가는 가을을 잘 담아내셨네요

     

    '바깥 마당에 널어 말리던 그 가을을 훔쳤던 거다'

    '손가락에선 익숙한 가위질로 여문 가을 여는 소리'

     

    한 편의 시 속에 시어들이 수북합니다

    붉게 물들어 가는 시인의 얼굴이 행복해 보입니다.

     

  • 이설윤님께
    이난순글쓴이
    2023.11.29 08:00 댓글추천 0비추천 0

    하릴 없이 촌티나는 인생을 살아 온거같습니다

    남편과 늘 하던 얘기 " 우린 시골 오지에서 정말 출세 했어!

    미국까지 와서 살게 될 줄 누가 알았누?!" 라며 자신들을 대견해 했죠 흐흐

    고추 말리며 정말 행복해서, 행복해서 하루 왼종일을 녀석들 뒤적이며 갈볕에 물들었었지요!


- 1948년 충남 청양 출생
- 2014년 콜로라도 덴버로 이민
- 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 제6회 애틀랜타신인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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