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 김 수린
그날 아침 첫 환자 진료 기록을 보니 이름은 애나 몰간, 나이는 98세, '새로운 틀니를 맞추고 싶음' 이라고 적혀있다.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늘 하듯이
"안녕 하셔요?" 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니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98세 된 사람이 새 틀니를 맞추고 싶어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라고 묻는다.
진지하면서도 약간의 주저함이 엿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전혀 아니지요. 오히려 98세이시니 더 가치 있는 일이지요, “
하고 대답하니 표정이 밝아지면서 미소가 번진다. 현재 끼고 있는 틀니는 30여 년 전에 한 것으로 헐겁기도 하고 닳아져서 씹는 것도 불편하고 웃을 때 치아가 보이지 않아 치아가 없는 사람처럼 보여 새로운 틀니를 만들어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하얀 치아를 보이며 예쁜 미소를 짖고 싶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진료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는 마치 잘 건조된 꽃 다발 같이 작고 연약해보였다. 세월의 흔적으로 골 깊은 주름살은 보이지만 연한 화장기에 핑크 립스틱을 바른 이 노인에게 부쩍 흥미를 느끼며 나는 의자를 바짝 당겨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앉았다.
“그래요. 새 틀니로 바꾸면 치아색깔을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지요. 그런데 아직도 운전하세요?” 하고 물어 보았다.
플로리다 중부에 위치한 마운트 도라 라는 이 작은 도시엔 은퇴한 사람이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내 치과 환자의 평균 연령이 65세이고 그중에 90세 넘은 노인 중에 아직도 운전하는 분이 더러 있기에 설마 하면서 물었다.
“음- 그래요. 나 운전해요. 근데 얼마 전에 차도 새로 샀어요.”
"그래요! 대단하네요, 그런데 내가 일아 맞추어 볼까요? 그 차 색갈이 빨간 색이죠?”
내가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해서 물으니 애나가 눈이 둥그레지며
”맞아요. 빨간색이에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초록색 블라우스에 같은 색의 7 부 반바지, 그리고 비취인 듯 보이는 녹색의 팔찌를 끼고 있었다. 신발도 같은 색 계통의 초록색이다. 내 시선이 신발에 머무르는 것을 보더니 애나가 말했다.
“이 신발, 내가 색칠했어요.”
“와, 정말 대단하네요!”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발등 위로 끈이 있는 발레리나 신발 모양의 하얀색 캠퍼스 천으로 만든 신발을 그녀는 손수 초록색으로 페인트를 한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이 세인트 패트릭스데이에요”
“아일랜드 출신이셔요?” 하고 내가 물으니
“네. 우리 부모님이 내가 어렸을 때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셨지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3월 17일, 세인트 패트릭스 기념일이다. 영국인 패트릭은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아일랜드로 들어갔으며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세 잎 클로버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죽은 3월 17일을 성 패트릭 날로 정하는 한편 클로버가 달린 모자에 쓰고 초록색 옷을 입으며 그 날을 기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통을 잊지 않고 오늘을 위해 신발 까지 초록색으로 칠하는 이 자그마한 98세의 할머니. 그녀는 요즘 세간에 떠도는 우스갯말 중에 90세가 넘으면 집에 누워있으나 산에 누우나 차이가 없다고 하는 통념을 무색케 하기에 충분한 할머니였다.
애나 할머니와 이야기하면서 나는 여배우 배티 화잇(Betty White)이 생각났다. 그녀는 90이 넘는 나이에도 드라마와 저작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재치와 유머로도 유명했다. 그중에서 내가 재미있게 사용하는 인용구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나는 내 낡은 육체에 갇혀있는 십대 소녀랍니다.’
‘우리 엄마가 내게 이런 말을 늘 하셨지요. "나이가 들수록 모든게 더 좋아 진단다, 네가 바나나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건강한 100세를 바라보는 요즘의 노인층을 자주 만나면서 배티 화잇의 긍정적 자세를 떠올리곤 한다. 많은 노인들이 자신들이 은퇴 후 이처럼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제 은퇴했으니 그저 편안한 노후를 지내다가 죽음을 맞으리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아직도 내속에 이루지 못한 꿈과 소망들에 대한 열망이 있음을 발견하고 당황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많은 경우에는 내가 얼마나 더 살거리고, 하면서 그 꿈을 다시 밀어내곤 한다. 그런 관점에서 이 나이에 새 차가 무슨 가당한 일일까 하는 망설임을 극복하고, 오늘 운전 할 수 있으니 원하는 빨간 새 차를 구입하는 애나 할머니의 행동을 나는 용기이고 자존감이라 말하고 싶다. 98세에 새로운 틀니를 맞추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십대에 아름다운 미소가 중요했다면 지금 나이가 얼마든 그것 또한 여전히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 미소 지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그것은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
진료가 끝난 후 애나 할머니와 나는 파킹 장에 가서 그녀의 새로 산 빨간 차 앞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같이 서보니 그리 크지 않은 나보다도 머리 하나는 작을 만큼 그녀는 왜소했다. 그래도 아직 허리가 꼿꼿하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가 더 대단해 보인다.
나는 찍은 사진을 프린트해서 내 책상 앞에 붙였다. 그리고 애나 할머니 옆에서 미소 짓고 있는, 가발을 쓰고 있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네 달 전에 유방암 절개 수술을 받고 몇 번의 항암 치료 후 나는 대머리가 되었다.
암이라는 질병은, 몸속 세포 어느 구석에 반란군처럼 숨어 있다가 공격의 기회만을 노리는 복병들의 집합체인듯 싶다. 그리고 항암 치료는 숨바꼭질하고 있는 그 복병들을 찾아내서 죽이려하는 무모하고도 처절한 전쟁같은 겄이다. 나는 그 전쟁 통에 머리털이 다 빠지고 비썩 마른 중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육체의 고통은 마음까지도 피폐하게 만들어 심한 우울증으로 숨 쉬고 산다는 것 자체가 버겁고 귀찮는 매일을 보냈다.
항암 치료후 당분간 투병에만 전념하겠다는 계획을 바꿔서 치과에 돌아와 진료를 시작했다. 예전에 비해 진료 스케줄을 많이 줄였지만 적어도 환자를 보는 동안 만큼은 내 자신이 환자라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복직한지 며칠 안 되었는데 애나 할머니를 만난 것이다. 비록 치과의사와 환자와의 직업적인 만남이지만 내게 있어 그녀와의 인연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는 육체적인 나이나 건강 상태가 어떠하든 오늘 하루를 산다는 것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 이라는 것을 내게 상기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 내가 살아 있어 한 사람을 미소 짓게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나의 하루는 가치 가 있다고 했던가. 그리고 아무려나 반란군 보다는 아군의 숫자가 월등히 많으니 나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때엔 머리털도 다시 자라날 것이고 메마른 몸에도 살이 오를 거야.
애나 할머니를 통해서 한결 여유를 찾게 되었던 나는그녀의 틀니를 정성껏 만들어드렸다. 그녀가 원했던 대로 희고 가지런하게.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언제나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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